여백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손정기 작가의 전시 <밤의 경계에서>가 세줄 갤러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절제된 색감과 간결한 구도 속 자연과 사람,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를 담아낸 작품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시에 마주하게 만듭니다. 김왕식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감상이 아닌 명상을 하게 된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전시는 고요히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으로 초대합니다.
그는 말이 없는 화가가 아니라, 가장 깊은 말을 그림으로 건네는 시인이다.
- 문학 평론가 김왕식 -
마주하기
광활한 풍경과 절제된 색, 간결한 구도 위를 걷는 인물과 그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이중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카페 창가 너머로 바라보는 바다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지평선은 안정감과 평온함을 주지만, 정작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나 끝없는 들판 위에 서게 되면 거대한 자연의 압도적인 기운 속에서 불안과 막막함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의 내면 속 흔들리는 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손정기, Alone on the Road, 90.9x72.7cm, 2024
손정기, Alone on the Road, 90.9x72.7cm, 2024
화면은 마치 제3자 시선으로 그려진 듯 풍경을 담아냅니다. 자연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과거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된다면, 우리는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The Quiet Journey, 116.8x91cm, 2025
The Quiet Journey, 116.8x91cm, 2025
손정기 작가는 색을 꺽는다. 빛을 덜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감각의 축소가 아니다. 오히려 색이 말을 멈추고, 그 틈에 감정이 쉬어갈 자리를 내어준다. 흑과 백, 그 두 극 사이의 비명 없는 무늬가 그의 화면을 채운다. 그 미세한 농담(濃淡)의 차이 속에서 빛이 걷고, 바람이 쉬고, 고독이 숨을 쉰다.
- 문학 평론가 김왕식(1)-
밤의 경계
작품 속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해가 지기 전, 밤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림자는 가장 길어지며 작가는 그 시간과 고독의 여정을 작품에 담아냅니다. 햇빛에 의해 자연스레 드러나는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Walking Alone, 162.2x130.3cm, 2025
Walking Alone, 162.2x130.3cm, 2025
그렇다면 만약 작품에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아델 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그림자는 조국이나 고향처럼 태어날때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보편적 가치, 혹은 시민적 연대성과 인간의 정체성을 상징하기도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그림자를 잃게 되었을 때, 그는 단순히 그림자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리 또한 잃게 됩니다.
Beginning of Thought, 162.2x130.3cm, 2023
Beginning of Thought, 162.2x130.3cm, 2023
작가의 작품 속 인물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태양 아래 드러나는 또 하나의 얼굴이자, 존재를 환기시키는 매개로 작동합니다. (전시장에는 그림자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 있는데요.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는 시간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그대로 바라보기
"슬프면 억지로 긍정하지 않고,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터널 속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작가의 말에서 감정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고, 작품을 통해 그런 여정을 다시금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앎에서 오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울림을 주었는데, 이 주제들을 추후 커뮤니티에서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려 합니다.
Beneath the Silence, 90.9x72.7cm, 2025
Beneath the Silence, 90.9x72.7cm, 2025
자신과 마주하는 명상의 시간을 선사하는 손정기 작가의 전시 <밤의 경계에서>는 9월 6일까지 세줄 갤러리에서 진행됩니다. 직접 작품 앞에 서서 여백 속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경험을 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참고:
(1) 문학 평론가 김왕식, 손정기 작가의 세계를 거닐다, 세줄 갤러리 제공
✅ 매주 토요일에는 작가님이 갤러리에 방문한다는 소식! 정확한 일정은 작가님 SNS를 통해 확인하신 후 방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