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온 작가 아니카 이(Anika Yi)의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일반 미술관에서는 보기 어려운 재료들로 제작된 작품들을 선보이며, 색다른 입체감을 전달합니다.
두툼한 검정 커튼을 뒤로 젖히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설치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향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운 독특한 향은 작가와 조향사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이 협업한 <두 갈래 길을 한번에 걷기>(2023)로, 생물화된 기계, 고대 수생 생물, 원시 환경 등을 상상하며 만들어졌습니다(1).
거대한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방산충 시리즈는 외계 생명체를 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촉수와 광섬유 표면을 따라 퍼지는 빛의 파동이 시선을 사로잡죠. 이 작품은 오래전 단세포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인공물과 유기체 사이의 소통을 상상하며 기계의 생물화 개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기계의 생물화 개념이란?
💡 '기계의 생물화'는 기계를 생명체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계과 생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 협력하는 개념입니다. 즉, 기계가 사람 혹은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기계가 결합되어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로봇 다리를 사용해 더 잘 걸을 수 있는 것처럼, 기계와 생물이 상호 작용하며 함께 원활히 기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산충(Radiolaria)
이미지: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방산충(Radiolaria)이미지: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쿰쿰한 냄새의 주인공 <생물오손 조각>(2024)은 튀긴 꽃으로 만들어진 알 수 없는 형상의 작품으로 튀긴 꽃이 부패하면서 나는 시큼한 냄새까지 더해져 꽃의 아름다운 형상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오염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꽃의 의미, 아름다움과 부패 그리고 영속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생물오손'은 물에 잠긴 고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면서 형성되는 생물막을 일컫는 말로, 인체나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침투해 균열을 일으키는 자연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전실 설명 중-
생물오손(生物汚損)이란?
💡 생물+오손(더럽혀짐, 손상됨)은 생물에 의해 무언가 오염되거나 손상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건축물이나 유적이 곰팡이, 이끼, 박테리아 등에 의해 더럽혀지는 과정도 이에 포함됩니다. <생물오손 조각>시리즈는 튀긴 꽃들이 조각에 부착된 채 서서히 부패하며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너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의 관계를 탐구하는 <또 다른 너> (2024) 작품은 인피니티 미러 속에서 박테리아가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환영 속에서 박테리아의 증식이 시각적으로 펼쳐지며,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또한, 박테리아가 하루만에 얼마나 번식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작가의 작품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나 박테리아를 직접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하며, 마치 실험실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를 통해 '살아 있는 전시', '바이오 아트(Bio Art)'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생물과 무생물, 기술과 생물의 경계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전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